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하라 신타로 (문단 편집) === 정치 활동 === 1967년 [[요미우리 신문]]사의 의뢰로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다음해인 1968년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 소속으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 일본 역사상 최초의 300만 표 초과지지를 얻었다. 이는 당시 국민배우였던 동생 유지로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알려져있다. 이후 1972년에 중의원으로 자리를 옮겨 제33회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중의원 초선 동기로 [[노다 다케시]]가 있다. 이 시기에 [[김대중 납치 사건]]과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때 한국 군사정권을 옹호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을 북한 [[김일성]]의 스파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방해 노란 싹수를 드러냈다. 이후 정치인과 소설가로서 병행하여 활동하며 도쿄도지사 직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노베 료키치에 밀려서 낙선. 그래도 상당히 따라잡기는 했다. 1983년, 자유민주당의 현재는 없어진 파벌인 자유혁신동우회를 나카가와 이치로[* [[홋카이도 11구]] 전 의원 [[나카가와 쇼이치]]의 아버지이자 나카가와 유코의 시부.] 회장 사후 이어받아 이시하라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정치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허나 나카가와 사후 구심력 저하는 피할 수 없었고 이내 이시하라를 비롯한 파벌원들은 [[세이와 정책연구회]]([[후쿠다 다케오|후쿠다파]])에 합류한다. [[나리타 국제공항]]의 철도 접근성을 개선한 것이 운수대신 할 때의 업적이다. 당시만 해도 일본 중의원은 [[비례대표]] 없는 [[중선거구제]]였는데 이때 자기 당 후보이자 경쟁자였던 누군가가 [[아라이 쇼케이]] 후보 포스터에다가 북한사람이라고 대놓고 비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시하라는 자기 비서가 했다고 꼬리 짜르기를 시전한 뒤 자기 혼자 당선되었다. 1986년 선거 때부터는 동반당선되기는 했지만 이때의 앙금 때문에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1999년 지방선거에서 경기회복을 틈타서 [[도쿄도지사]]에 당선되었다. 이 때 도지사에 당선되면서 [[춤추는 대수사선]]의 [[아오시마 슌사쿠]]는 "도지사[* 아오시마 유키오(1932~2006).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도쿄도지사를 지냈다.]와 같은 이름인 아오시마입니다."라는 자기소개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2003년에는 [[가나가와현]] 지사 선거에 출마한 [[마쓰자와 시게후미]]의 선거 지원을 해주었다. 이 사람이 운수대신 시절 [[나리타 신칸센]] 백지화랑 동시에 [[나리타 국제공항|나리타 공항]] 안에 [[케이세이]] 입선 허가를 해줬다. 자세한 건 [[나리타 국제공항/철도]] 참조. 참고로 [[운수성]] 대신, [[도쿄도지사]]를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각각 [[국토교통부장관]], [[서울특별시장]] 정도가 된다. 2009년에는 도쿄 도민들도 상당수가 반대하던 2016 도쿄 올림픽 유치를 한답시고 안 그래도 적자인 도쿄도 예산을 어지간히 거덜낸 후 침몰. 뒤에 보겠지만 [[2020 도쿄 올림픽|2020년에도 유치한다고 한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이때 유치 슬로건이 <[[환경]]과 세계통합>인데 삼국인 발언으로 분열과 반목을 조장하던 이시하라가 통합을 외쳤으니 이빨도 안 먹혔다. [[1964 도쿄 올림픽|한번 이미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기도 했고]]. 2011년에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유치를 축하할 때 "평창이 훌륭한 [[올림픽]]과 [[패럴림픽]]을 개최해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발언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5151033|#]] 2012년 10월 25일, 뜬금없이 도쿄도지사 직에서 사퇴하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5896002|기사]]. 후임으로는 [[이노세 나오키]]가 당선되었다. 신당을 창당하여 중의원 [[선거]]에 참여, [[일본국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이 되고 싶은 것 같다. 무산된 [[하시모토 도루]]의 [[일본 유신회(2012년)|일본 유신회]]와의 연대도 다시 시도하여 11월 3일 [[교토시|교토]] 오쿠라 호텔에서 이시하라와 하시모토의 회동이 있었다. 회담 장소가 교토 오쿠라 호텔인 건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이곳에 [[사쓰마#s-2|사츠마 번]]의 저택이 있었기 때문. '제2의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겠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선택한 듯하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이시하라와의 연대는 어렵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성과는 없었다. 다만 이시하라의 제2의 [[메이지유신]] 발언은 조금 먹힌 듯. 이런 이시하라의 행보에 그의 절친인 [[가메이 시즈카]] 전 [[국민신당(일본)|국민신당]] 대표마저도 "요즘 이시하라가 말하고 다니는 게 뭔 말인지 모르겠다. '''뭔가 정신쇠약자 같은 게 있다'''"라고 디스했다. 대다수의 일본인들도 '드디어 맛이 갔구나!' 하는 반응. 2012년 11월 16일, 여론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중의원 해산을 선언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했다.]] 이시하라의 행보도 바빠진 상황. 일단 이시하라는 자신의 신당인 [[태양당]]과 감세정책을 주장하는 군소정당 "감세일본", [[히라누마 다케오]]의 "일어나라 일본" 등과의 통합을 선언했다. 또한 이날에 도쿄에서 하시모토 도루와 재회동을 가졌다. 하시모토가 소비세인상, 탈원전, [[TPP]] 참여 등을 이시하라가 인정해 준다면 자신은 이시하라가 주장하는 [[사토 에이사쿠]]의 비핵3원칙 수정에 동의하여 보수연대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시하라는 17일쯤에 입장을 밝혔는데... 11월 17일, 이시하라가 하시모토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태양당]]과 [[일본 유신회(2012년)|일본 유신회]]의 '''합당이 성사되었다!''' 이로써 극우 보수연대가 성사되었고, 이시하라는 더욱 총리직을 향한 야망에 불탔다. 2012년 12월 16일 일본 중의원 총선에서 도쿄권역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하지만 [[아베 신조]]의 수상취임 지지를 놓고 하시모토 도루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결국 성향상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이 갈라선다"는 전망도 내놓았다. 이후 참의원 선거에서 유신회가 칸사이를 제외하고 전멸하는 바람에 되려 하시모토의 입지만 확인되었고 이시하라의 입지가 좁아진 가운데 2014년에 들어서는 하시모토가 결속당과의 연대를 추진하자 개헌론자인 이시하라는 결속당이 호헌주의라면서 분당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자민당으로 복당도 고려 중이라고 하였다. 결국 2014년 5월 29일 [[평화헌법]] 개정을 둘러싸고 [[결속당]]과 연대에 대해서 결정적인 문제라면 당을 나눠 가져도 좋다고 하면서 하시모토와 분당 의견이 일치하면서 결국 분당을 하였다. 이시하라는 [[히라누마 다케오]], [[나카야마 나리아키]], 나카야마 교코, [[마쓰자와 시게후미]] 등 자기 계파 국회의원 22명을 데리고 2014년 8월 1일에 [[차세대당]]을 창당했다. 대표는 [[히라누마 다케오]]가 맡기로 했고, 자신은 당의 최고고문(한국의 상임고문 격)으로 추대되었다. 2014년 12월 14일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중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9번을 받았으나 차세대당이 대패함에 따라 본인도 같이 낙선했다. 같이 나온 [[다모가미 도시오]] 전 항공막료장도 낙선. 2014년 12월 [[제3차 아베 신조 내각|아베 내각 3기]]가 발족하는 날 정계은퇴했다. 물론 마지막에도 역시 망언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본인의 말로는 "평생 미움을 받으면서 죽고 싶다"고...[[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7305186|#]] 2016년 9월에 츠키지 시장의 토요스 이전문제에서 성토(盛土) 문제로 난항을 겪게 되자 해당 지시가 내려졌을 때 도쿄도지사였던 이시하라가 TV 토론프로에 출연하였는데, "당시에 해당 내용에 대해선 하나도 보고를 받지 못했다. 난 완전히 속았다. [[도쿄도청|도쿄도]]의 공무원은 부패했다." 하면서 비판하였다. 하지만 여론의 반응은 영 냉담했다. 이시하라가 [[감탄고토|현직 도쿄도지사였던 시절에 "내 휘하에 있는 도쿄도의 공무원들은 정말 우수하다"면서 항상 치켜세우다가, 일이 생기니까 손바닥을 뒤집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직 당시에도 1주일에 2~3번밖에 도청에 출근하지 않은 탓에 '출근도 제대로 안한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남 탓이나 하느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2017년에 들어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이 문제가 더 커지자 "증인으로 출석한다"고 답변할 뿐 기자들의 질문을 회피하고 응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세운 [[차세대당]]이 2018년 11월 1일에 자민당에 흡수되는 식으로 해산되었다. 그리고 2020년 6월에 이지스 어쇼어 취소에 비판 트윗을 올렸다.[[https://mobile.twitter.com/i_shintaro/status/127310976744840806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